“부드럽고 감미로운 여름비처럼 여인은 장소의 고요에 잠겼다. 사방의 모든 것이 고요하고 그 고요가 나무들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고요는 나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다이애나 베리스퍼드-크로거의 ‘세계숲’)
무시무시하고 구슬펐던 일주일, 땅과 하늘 사이가 온통 비명으로 가득 찬 것 같았다. 의성에서 시작된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 최악의 산불 피해를 기록하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존재를 집어삼켰다. 오랜 시간 숲을 키워온 흙과 물, 그 이름을 다 알 수도 없는 나무와 풀과 벌레, 그곳에 삶의 터전을 일구었던 동물과 인간, 그리고 인간이 쌓아 올린 생활과 문화의 흔적까지. 신비로운 우주였던 숲은 이제 검고 마른 잿더미가 되었다.
반면, 현실의 재난 현장을 둘러싸고는 온갖 소란스러운 인간의 말들이 들려왔다. 중국인이 불을 질렀네, 극우가 산불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하네 등 확인되지 않은 음모론이 서로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며 퍼져 나갔다. 하지만 음모론에 귀 기울이기보단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고 대형 산불의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려 노력해야 할 것 같다.
가뜩이나 건조한 봄, 인간이 불을 너무 부주의하게 다룬 것이 이번 산불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작은 불씨를 걷잡을 수 없는 재앙으로 키운 건 욕심 사납게 이윤을 추구하는 인간적인 욕망과 삶의 양식이었다. 돈벌이에만 집중하고 자연을 얼마든지 착취 가능한 자원으로 깔보는 개발 논리가 오랜 시간 차근차근 재난의 토양을 다져온 것이다.
한국에서 산불은 점점 대형화되고 있다. 울진 대형 산불이 일어났던 2022년에는 전국적으로 750건의 산불이 일어나 2만4700헥타르의 산림이 소실됐다. 산림청은 그때도 지금도 건조한 날씨와 강한 바람을 탓했지만, 그게 진실의 전부는 아니다. 한국방송(KBS) ‘시사기획 창’ ‘녹색 카르텔’ 편에 출연한 전문가들은 산불이 돈이 되는 시스템과 그로부터 돈을 버는 산림청의 ‘녹색 카르텔’이 대형 산불의 원인이라고 지목한다.
산불이 나면 그 지역에 막대한 공공 예산이 배정된다. 산림 복구를 위해서다. 이 복구 과정은 ‘벌목-임도-사방댐 설치-나무 심기-어린나무 관리’의 get more info 과정으로 진행되는데, 그 첫 단계인 벌목에서부터 문제가 생긴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나무까지 다 베어버리는 것이다. 살아 있는 활엽수는 남겨 둬야 한다는 지침 따위는 지켜지지 않는다. 이렇게 벤 목재를 화력발전소에 판매하면 돈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양한 수종이 공존하던 숲을 적극적으로 황폐하게 만든 뒤 인공적으로 조림하는 숲은, 송이를 채집할 순 있되 산불에는 취약한, 단일 종 소나무 숲이다. 누군가는 “소나무는 죄가 없다”고 외치는데, 그렇다, 이건 소나무의 죄가 아니다. 계획적으로 종 다양성을 줄여 재해에 취약한 환경을 조성하는 인간의 죄다.
그뿐만 아니라 단계별 사업의 많은 부분이 경쟁 입찰이 아닌 산림청 관계자가 임의로 진행하는 수의 계약으로 진행된다. 녹색 카르텔이 재해 복구 공공 예산을 나눠 먹는 것이다. 물론 산림청이 대형 산불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하지만 산불을 막아야 하는 관계자들이 오히려 그로부터 돈을 번다면, 이는 문제다.
불붙은 숲의 울음소리를 피해 도망친 극장에서, 나는 역설적이게도 물의 애니메이션을 만났다. 긴츠 질발로디스 감독의 애니메이션 ‘플로우’다. 이 작품은 인류가 자취를 감춘 가까운 미래의 어느 날을 배경으로 한다. 문명의 잔해만 남은 세상에는 여전히 다종다양한 생명들이 활기차게 대지를 누비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놀라운 속도로 대홍수가 닥쳐온다. 동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생존을 위해 노력하고, 우리의 주인공들은 한 척의 배에 올라타게 된다. 다정한 카피바라, 경계심 많은 고양이, 도구에 집착하는 여우원숭이, 활달한 골든리트리버, 그리고 우아하고 강인한 새 뱀잡이수리. 서로 다른 성격과 습성을 지닌 이들이 재난 시대의 동반자가 되어 표류한다.
‘플로우’에선 동물이 인간의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이는 ‘라이온 킹’이 선보이는 소년의 성장담이나 ‘주토피아’의 인간 사회 풍자처럼, 동물에게 인간의 성질을 입혀 인간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던, 대중적인 애니메이션 우화들과는 다른 선택이다. ‘플로우’는 이런 익숙한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히 ‘동물의 이야기’이기를 꿈꾼다. 동물의 고유한 몸짓, 소리, 눈빛 그리고 행동만으로 그들의 시간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것이다.
덕분에 나는 이 작품을 인간 사회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으려는 충동을 누르고 재난을 겪는 동물들의 이야기 그 자체로 경험할 수 있었다. 인간의 침묵이 강렬한 메시지를 구현하는 형식이 된 셈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스크린 위를 출렁이던 물결이 현실에서 숲을 뒤덮었던 불길과 겹쳐 보였던 탓이었다.